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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August 19, 2020

[직설]요구의 자격 - 경향신문

pasokpatokin.blogspot.com
2020.08.19 03:00 입력 2020.08.19 03:0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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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의 한 브랜드 아파트에 배달을 하다 나오는데, 빨간 글씨와 느낌표로 구성된 강렬한 현수막을 봤다. ‘청년임대주택 건설 중단하라!’ 10억원이 넘는 아파트 주민들의 당당하고 솔직한 욕망이 대로변에 걸렸다. 가난한 이들이 모여 사는 주택이 건설되면 주거환경이 나빠지고 집값이 떨어질 거라는 공개 주장에 부끄러움과 망설임은 느껴지지 않는다. 외려 자신의 재산을 지키고 행복을 추구하는 권리행사처럼 보인다. 반면, 나 같은 배달노동자가 이들 주민에 반발해 함께 살자고 외치면 사회적으로 실패한 사람의 피해의식이나 불평불만으로 치부될 가능성이 높다. 대응이라도 해주면 다행이지만, 아무런 영향을 못 주는 게 더 큰 문제다. 이런 문제는 도처에 널려있다.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

기안84는 갖은 역경을 이겨내고 취직하는 남성주인공과 달리, 귀여움과 상사와의 연애로 취직한다는 여성캐릭터 설정으로 만화를 그렸다. 고등학생들은 블랙페이스를 하고 관짝 밈을 표현했다. 모두 웃음을 주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누군가는 웃지 않았다. 여성혐오이자, 인종차별이라는 비판을 하자, 표현의 자유와 ‘선의’로 옹호한다. . 심지어 인종차별을 가르치지 않는 한국교육을 비판한 샘 오취리에겐 한국을 모욕하고 학생들을 비하했다는 혐의를 씌웠다. 여기에 한 가지 비난이 추가됐다. 가난한 나라 사람이 한국인들 덕분에 성공했는데 어디 감히 한국을 비평하냐는 것이다.

그가 사과하면서 대한민국이 새겨진 옷을 입은 이유일 것이다. 그에겐 말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는 것 자체가 과제다. 인종문제뿐 아니다. 이주노동자들의 주거환경 개선을 말하거나, 장애인이 노동할 권리를 주장하거나, 활동가들이 동물권을 얘기하면 모두 배부른 소리로 치부된다. 우리는 특정한 이들을 동등한 구성원이 아니라 소란 없이 사회를 유지키 위한 관리 대상으로 여긴다. 내가 양보하고 봐주고 있는 존재가 감히 비판을 하면 기분이 상하고, 본래의 위치를 각인시켜주고 싶은 법이다. 반면, 고급아파트 주민들처럼 누군가는 너무나도 솔직하게 자신의 행복을 추구한다. 냄새나는 배달노동자가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하게 하거나, 승강기를 타는 배달원들에게 전기요금을 걷는 것이 당연한 권리로 보장된다. 사회적 위치에 따라 표현할 수 있는 주장과 욕구의 피라미드가 층층이 구분돼 쌓여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피라미드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을 ‘사회성’이 뛰어나거나 ‘사람 좋다’고 칭찬한다. 경제적 계급 차이뿐만 아니라 욕구와 욕망의 계급 차이가 공고히 유지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한민국 광복절 경축식에서 ‘모든 국민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 헌법 10조의 시대를 열겠다’고 했다. 국가의 광복뿐만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광복이 이뤄졌는지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단 한 사람의 국민도 포기하지 않겠다’ 했다. 그러나 누군가가 해방되려면 억압하는 자들의 평온한 일상이 포기돼야 한다. 우리 사회에 차별도 불평등도 없다고 믿는 눈치 없는 이들의 한가로움을 흔드는 것이야말로 단 한명의 구성원도 포기하지 않는 헌법 10조의 시대를 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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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18, 2020 at 11:00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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